![]()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창비 2005 역사는 믿을 수 없고, 인간은 이해될 수 없고, 세계는 결렬과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구라'고, 나와 너는 말이 통하지 않는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말이다. 우리는 오래된 역사 속의 한 사건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시대환경이 바뀌었고, 동일한 사건이라도 누구에 의해 기록되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게다가 문자라는 게 원래 삶 그 자체를 제대로 반영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역사의 이러한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진실에 한발짝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김연수는 이 단편소설집 말미에 남긴 작가의 말에서 자신이 또 거짓말들을 양산해냈다고 겸손해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소설들은 우리가 실체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방해가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채만식의 단편소설'치숙(痴叔)'은 내 가치관 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던 작품으로 남아있다. 일제시대 배경의 이 소설에서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나'는 쉽게 말해서 친일파다. '나'가 생각하기에는 일본에 협력해서 편안한 삶을 영위하자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사회주의를 꿈꾸는 아저씨가 어리석게만 느껴진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속에서, 또는 역사책에서 만나게 되는 친일파는 대부분 타자(他者)화되어 있다. 친일파는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무조건 나쁜 놈들인 것이다. 친일파라는 단어의 어감 자체에서 이미 우리는 그런 의미를 느끼고 있다. '그들이 왜 그래야만 했을까?'는 질문은 해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평범한 친일파의 관점에서 바라본 일제시대 이야기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럼 친일파 시각으로 일제시대를 바라봐야 제대로 보는 것이란 말인가? 물론 그런 말은 아니다. 단일한 시선보다는 다양한 시선이 모여져야 한 사건에 대한 입체적 조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옳고 그른 가치판단은 사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이뤄진 다음에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나온 단편소설들은 저마다 독특한 화법을 띠고 있다. 한 사람의 작가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서 '나'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나'의 옛 애인은 '나'가 혼잣말을 곧잘 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도대체 진실은 어느 쪽인가? 결국 '기억을 쫓아가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p. 19).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는 '지금 여기'에 없는 사람에 대한 주변인들의 회상이다. 주변인들에게 듣는 '그 사람'은 내가 직접 만나서 알 수 있는 '그 사람'과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같을까? '삶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불리한 입장에 놓인 역사가와 같다. 하찮은 사실들은 어쩔 수 없이 엄숙하고도 중요한 양상을 띠게 된다'. <뿌넝숴(不能設)>은 한국전쟁 당시 소위 '인해전술'에 참가했던 어느 중공 인민군의 독백이다. 그가 바라본 인해전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매우 다르다. <거짓된 마음의 역사>에서는 19세기 말 미국인 사설탐정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바라보는데, 정작 이 사람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주인공의 소설을 추천한 작가의 독백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그 사실도 한참 읽고난 후에라야 알 수 있다.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전'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는 인민재판을 받게 되는 어느 일제 부역자의 독백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또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해 상당부분 우리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 사건이나 현상을 해석하게 되는 경우 그 고정관념에서부터 출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얼마나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까? 또한 작가 김연수는 하찮고 우연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역사가 반드시 필연적인 요소들에 의해 전개되어 왔을까? 예컨대 공산주의는 공산주의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역사적 환경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고, 세계대전도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무르익어서 일어난 것일까? 예컨대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한다. 어린 히틀러는 유태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시절에 어느날 집으로 가는 하교길에서 히틀러는 동네 불량배들에게 돈을 뜯겼는데 하필이면 그 중의 우두머리가 유태인이었다....그리고 나서 집에 가서 TV를 보는데 TV 연속극에 나오는 주인공이 히틀러는 무척 맘에 안들었다....그런데 알고보니 그도 유태인이었다....그래서 그날 이후로 히틀러는 유태인을 무척 싫어하게 되었다..... 결국 히틀러의 유년시절 중 어느 '운수 나쁜 날'이 후에 엄청난 유태인 학살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상상은 말도 안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역사가 필연적으로 전개되어왔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완전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역사는 매우 우연적이고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곤 하'기 때문이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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